우리의 사랑에 우연은 없다. 고상하신 고전 문학들이 입 모아 낭만으로 치부하던 운명은 절실하지 않은 작자들의 변명에 불과하다. 사랑은 선택의 연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수천 년의 시간을 홀로 감내하고, 무용한 망각의 반복을 목도하면서도 차마 함몰시킬 수 없던 인연. 종양처럼 이성을 갉아먹는 염증에서 기인한 살의를 기꺼이 압도하는 애정. 명쾌한 해답 앞에 굴복하지 않으매 마침내 맞이한 변조의 서막. 인연은 늘 무궁한 익명匿名의 형태로 찾아오나, 무수한 선택만이 그것을 명명命名한다. 사랑. 진부하고 단조로운 평안을 저버리고 기꺼이 그의 운명에 얽혀드는 것. 온 인류의 역사가 열렬히 추앙하던 애정의 활자를 이해하고, 생경한 감각을 올곧게 발음하는 것. 미련 없는 생을 이 불멸의 존재만을 위해 영위해나가는 것. 세상에 존재하는 불가항의 인력이 우리를 하나의 궤도로 인도하였다 해도, 억겁의 회귀를 반복하던 무수한 시간이 거룩한 섭리였다 하여도, 우리를 정의한 것은 기어코 서로이기에. 선의도, 정의도, 책임도 아닌 오직 서로만을 이유로 택했던 그 모든 순간의 이름은 사랑이다.